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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신영복의 그림사색 _한겨레 신문_2012년2018-06-20 12:5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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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그림 사색]

등록 :2012-01-27 22:03수정 :2012-04-18 10:02

 

석과불식

주역(周易) 산지박(山地剝)괘의 그림입니다. 절망과 역경(逆境)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나뭇잎 모두 떨어지고 나목의 가지 끝, 삭풍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과실을 씨과실이라 합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이 씨과실(碩果)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먹지 않고 땅에 심어서 새봄의 싹으로 돋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해야 할 우리의 몫이며,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석과를 새싹으로, 다시 나무로 키우고, 숲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장구한 세월, 수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먼 여정은 무엇보다 먼저 엽락(葉落)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잎을 떨어뜨려야 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환상을 청산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체로(體露)입니다. 잎을 떨어뜨리면 뼈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이 뼈대를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뼈대를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본(糞本)입니다. 뿌리를 거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뿌리가 곧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역경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실패하고 있지 않은지 새해의 시작과 함께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성공회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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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6424.html#csidxfd17bc5c4f64cf790f6d9acd7a61056

 

피라미드

근대사가 구축한 세계의 구조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 역시 이러한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구조 속에서 우리의 삶이 영위되고 있습니다. 현대자본주의가 전념하고 있는 금융자본의 축적양식은 이와 같은 균열을 더욱 키우고 있습니다. 20 80의 양극화된 사회구조가 그렇습니다. 언제 경제위기가 닥칠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그렇습니다. 사회의 최상층에서부터 당장의 저녁 끼니를 걱정하는 최하층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가지고 있는 정서는 놀랍게도 불안입니다. 세상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일을 전망하지 못하고 오늘을 안심하지 못합니다. 피라미드는 꼭지만으로 피라미드일 수 없습니다. 중하부의 균열은 피라미드 자체를 서 있지 못하게 합니다. 축구경기도 다르지 않습니다. 미드필드가 강해야 합니다. 최전방 공격수 한두 명으로 경기를 이끌어 갈 수는 없습니다. 미드필드야말로 공격거점이며 방어진지입니다. 중견(中堅) 강소(强小)한 구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잎사귀를 떨어야 하는 엽락(葉落)의 이유입니다. 거품과 환상을 청산하고 뼈대를 직시해야 합니다. 세계의 뼈대와 우리 사회의 뼈대를 직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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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7434.html#csidxa3caf0aaa88aafabf7bb5a048e4dc71

 

의자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떠올랐던 기억 속의 그림입니다. 그러나 교실 복도에서 이러한 벌을 받던 기억을 가진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입니다. 머리 위로 의자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은 참으로 역설적인 그림입니다. 어릴 때는 의자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을 궁리하기에 급급하였지만 그러나 지금은 머리 위의 의자야말로 우리들의 초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의자를 만든 까닭은 그 위에 편히 앉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의자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있다는 것은 사람과 의자의 처지가 뒤바뀐 거대한 역설입니다. 거꾸로 된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만든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있으며, 자기가 선임한 권력으로부터 억압당하고 있으며, 그리고 채워도 채워도 가시지 않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갈증에 목말라하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위상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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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8511.html#csidx67649e0dba751aea4303f2a24c148ca

 

정본

논어 안연편(顔淵篇)에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政者正也)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무엇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인가. 뿌리()를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뿌리란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뿌리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을 거름으로 삼아 다른 것을 키우고 있는 형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정치가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 엽락(葉落) 체로(體露)에 이어 뿌리를 바르게 하는 정본(正本)과 뿌리를 거름하는 분본(糞本)이 곧 정치의 근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은 다른 어떠한 가치의 하위(下位)에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의 애정과 신뢰 그리고 저마다의 역량을 키우는 것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정치(政治)란 그 아름다움을 완성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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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19603.html#csidx19fc7d04687511daa32a8134d4e1738

 

청년시절

한 사람의 일생에서 청년시절이 없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아무리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꿈과 이상을 불태웠던 청년시절이 없다면 그 삶은 실패입니다. 청년시절은 꿈과 이상만으로도 빛나는 시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청년들에게는 청년시절이 없습니다. 가슴에 담을 푸른 하늘이 없습니다. 부모님들은 아이엠에프와 금융위기 때 실직하였고 지금은 수험 준비와 스펙 쌓기 알바와 비정규직이라는 혹독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진리와 희망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부정한 정치권력과 천박한 상업문화를 배워야 하고, 우정과 사랑을 키우기보다는 친구를 괴롭히거나 친구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며 좌절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뿌리가 사람이고, 사람의 뿌리가 청년시절에 자라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회의 비극입니다. 그 사회가 아무리 높은 빌딩을 세우더라도 꿈과 이상이 좌절되고 청년들이 아픈 사회는 실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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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0696.html#csidxda1d378e5b418c0a425c9099f372408

 

대학공간

한 개인의 인생에서 청년시절이 갖는 의미는 한 사회에서 대학이 갖는 의미와 같습니다. 대학은 그 사회의 미래가치를 경작하는 청년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참다운 대학이 없습니다. 대학은 독립공간이어야 합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고, 자본권력으로부터 독립하고 그리고 오늘로부터 독립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곳에서의 필요보다는 내일을 위한 가치를 창조하는 미래공간이어야 합니다. 비판담론, 저항담론, 대안담론의 산실이어야 합니다. 교육이 백년대계(百年大計)인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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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1739.html#csidx79a6e53f2774605b2ee178e3425ed0e

 

책상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부분에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학교를 떠나는 존 키팅 선생과 책상 위에 올라서서 선생을 배웅하는 학생들의 모습입니다. 공부란 무엇인가? 공부란 책상 앞에 앉아서 텍스트를 읽고 밑줄을 그어 암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상 위에 올라서서 더 멀리, 더 넓게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입니다. 책상은 그것을 위한 디딤돌일 뿐입니다. 모든 시대의 책상은 당대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장치입니다. 책상 위에 올라서는 것은 독립입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변화와 저항입니다. 그리고 저항이야말로 창조이며, 창조야말로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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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2800.html#csidxd1a02fd40125ec2afc82d687212e6ab

 

독서

서삼독’(書三讀)은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세 가지를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첫째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단은 텍스트를 충실하게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역사적 토대에 발 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하는 까닭도 독자 역시 당대 사회의 문맥(文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책상 위에 올라서서 더 먼 곳을 바라보는 조망입니다. 그리고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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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3886.html#csidxfe07f6608d7f7b180194ce5ad35453e

 

가장먼 여행

일생 동안의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머리 좋은 사람과 마음 좋은 사람의 차이,

머리 아픈 사람과 마음 아픈 사람의 거리가

그만큼 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 그것입니다.

발은 여럿이 함께 만드는 삶의 현장입니다.

수많은 나무들이 공존하는 숲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합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4937.html#csidx754795a6604f11a878d0f10c95abf6c

 

철학망치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가두고 있는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대부분이 주입된 것입니다.

우리의 꿈과 환상까지도

그 사회의 지배권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은 망치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발로 걸어가야 합니다.

꿈보다 깸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자유와 인권의 역사, 변화와 진보의 역사는

언제나 탈문맥(脫文脈)의 도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6091.html#csidx972da0fa334dcdc9d182b2dac192391

 

강물처럼

먼 길을 가는 사람의 발걸음은 강물 같아야 합니다.

필생의 여정이라면 더구나 강물처럼 흘러가야 합니다.

강물에서 배우는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강물은 유유히 흘러갑니다.

앞서려고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배우고

만나는 모든 것들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시내가 강을 만나면 강물이 됩니다.

강물이 바다에 이르면 이제 스스로 바다가 됩니다.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기어코 바다를 만들어냅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시내를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9279.html#csidxd89e136dbfdba6aadd43ef14181d646

 

길마음

도로는 직선이기를 원하고 고속이기를 원합니다.

길은 곡선이기를 원하고 더디기를 원합니다.

도로는 속도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이며

길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경작되는 인간의 원리입니다.

도로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이라면

길은 자기 자신이 목표입니다.

우리의 삶은 다른 어떤 가치의 하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직선을 달리고 있지만

동물들은 맹수에게 쫓길 때가 아니면

결코 직선으로 달리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길이어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보람찬 시간이어야 합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0289.html#csidxad95faa5b1d4c7aaccd0d26fee3dab7

 

 

자유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산책하다가

지팡이로 버섯 하나를 가리킵니다.

얘야 이것은 독버섯이야!’

독버섯으로 지목된 버섯이 충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쓰러진 그를 부축하며 친구가 위로합니다.

비바람 불던 날 그가 보여준 따뜻한 우정을 이야기했지만

쓰러진 버섯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친구가 최후의 한마디 말을 건넵니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버섯인 우리들이 왜 식탁의 논리

우리를 평가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유(自由)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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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1315.html#csidx2e10957e7dc0e2fa0b03d1baa2ccf04

 

기다림

평원을 달리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한동안 달린 다음에는 말을 멈추고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며 기다립니다.

영혼을 기다립니다.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혼을 기다리는 것이라 합니다.

질주는 영혼을 두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영혼을 빠뜨리고 달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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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2445.html#csidx268ad8abfcd11408f76ea23d75eb4ce

 

야심성유휘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

이 말은 밤하늘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어둔 밤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은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위로입니다.

몸이 차가울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길이 험할수록 함께 걸어갈 길벗을 더욱 그리워합니다.

맑은 정신과 따뜻한 우정이야말로

숱한 고뇌와 끝없는 방황에도 불구하고

그 먼 길을 함께하는

따뜻한 위로이고

격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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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3577.html#csidx1dbaf0e2dfcdc94a7b2de13cd781c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