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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한솥밥 - 류동림2017-10-10 16:2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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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솥밥

류동림


몇 걸음 또 몇 걸음 오르다가 이제 다리쉼이 필요할 때쯤이면 거기 나무 의자가 놓여있다.

이 동산에 <더불어 숲길> 산책로를 만들 때 잘라내고 남은 여분의 목재 중에 골라서 앉을 자리를 만든 것이다.

재질이 나무여서 그런지 거기 앉으면 여름엔 덥지 않고 추운 날에도 차지 않다.

바로 눈앞에 고 신 영 복 선생님의 얼이 스민 시화가 보인다.

올 때마다 읽었지만, 내용도 곱씹어 볼수록 새로운 데다가 선생이 직접 그린 그림과 글씨이기 때문에 정이 들어서 어김없이 다시 눈이 간다 눈으로 시화를 감상하고 있으면 새가 지저귀고 솔향기가 솔솔 풍긴다.

실내나 도심지에서 감상할 때는 느낄 수 없는 운치가 가득하다.

여기 동산 숲길에선 눈과 코와 귀가 모두 행복해진다.

그 자리엔 <소통. 배려. 화합.>라고 다른 솜씨로 써 있다.

 

이곳의 시화들 중에 <한솥밥>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그림에 음식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진 않지만 콩알 같은 얼굴의 아이들 스무 명이 두레상에 둘러앉아 있는 정겨운 분위기만으로도 보는 이가 배까지 든든해지는 듯하다.

독일의 음악가 <바흐>가 자식의 수가 수무명이나 되어 그들이 다 악보 그리는 일을 도와서 생계를 꾸리는데 보탬이 되었다고 한다. 두레상에 모여 있는 아이들 또한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본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장면이 불현듯 생각나게 한다.

어느 시골 초등학교에서 학생이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 학생 한 사람만 남았는데 그가 졸업하자 학교가 폐교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다. 두레상에 둘러앉아 있는 저 아이들을 그림 밖으로 꺼내서 어린 생명이 없는 요즘의 시골에다 풀어놓으면 생기가 돋고 활기찬 고장으로 되살아날 것만 같다.

<한솥밥> 시화엔 이런 대목이 있다. “대문을 열어놓고 두레상에 둘러앉아 한솥밥을 나누는 정경은 삶의 근본입니다.

평화는 밥을 골고루 나누어 먹는 것이 평화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정겨운 옛 시골 풍경을 떠오르게 하는 내용이지만, 더 나아가 선생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심장한 사회적 메시지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서삼독(書三讀)>에는 크고 작은 책 몇 권이 포개있는 그림 옆에 이런 글이 있다.

 “진정한 독서는 삼독입니다.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책은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 그 필자를 읽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 역사적 토대에 발 딛고 있습니다.

 독서는 새로운 탄생이고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입니다.”

.. 이 분은 독서를 해도 이렇게 치열하게 하셨구나. 뭐 하나도 대충 대충 넘기는 게 아니라, 마치 마음속으로 글의 저자와 토론을 하듯이 독서를 하신 것 같다. 대략 그런가 보다 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두뇌로 온전히 납득될 때까지 집요하게 따져보고 고민했을 선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런 진지한 자세는 무엇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문제의식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토끼와 거북이>에는 거북이가 잠자는 토끼를 깨우고 있는 그림과 함께 잠자는 토끼도 잘못이지만 발소리 죽이고 몰래 지나가는 거북이도 떳떳하지 못합니다. 토끼를 깨워 함께 가야 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토끼와 거북이의 원래 우화는 느리지만 성실한 거북이가 교만한 토끼를 이긴다는 내용이지만, 저 이야기도 선생의 깨끗한 가슴엔 쉽게 소화할 수 없는 가시처럼 걸렸나 보다. 저 유명한 우화에서도 선생은 승부에 대한 집착과 결과우선주의보단 더불어 함께 사는 도덕과 양심이라는 일관된 신념을 투영시킨다. 혹자는 뭐 그런 것에서까지 도덕을 찾나. 재미없는 양반일세라고 불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들도 글 옆에 있는 토끼와 거북이의 귀여운 그림을 보면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물론 다 선생이 직접 그린 그림이다. 기존 고정관념을 뒤집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근본적으론 인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진 분이라는 게 글 내용 뿐 아니라 그림들에도 나타난다.

 

<겨울 독방>: “신문지 크기의 햇볕 한 장 무릅에 올려놓고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 시간의 햇볕 한 장은 생명의 양지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결코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선생이 갇힌 몸이었을 때의 이야기리라. 오랫동안 햇빛도 잘 안 비치는 차가운 곳에 갖혀 있었지만, 이젠 선생의 글과 그림이 이렇게 햇빛 속에서 많은 이들에 감동을 주며 영원히 사람들과 같이 호흡하고 있다.

 

선생을 기념하여 조성된 이 <더불어 숲길> 산책로에 깔린 야자 매트를 밟고 오르는 첫걸음엔 묘한 떨림이 전해져 온다.

야자껍질로 엮어 짜서 잘 망가지지 않고 미끄럽거나 걸려 넘어질 염려도 없는 재질이다.

이 산책길을 만든 분들의 세심한 배려가 곳곳에 엿보인다. 그래서인지 오르내리면서 서로 갈 길을 양보하는 이 기념 산책길도 신 선생을 닮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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