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마음으로 이어진, 보통이 아닌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이야기 _ 심은희2018-08-14 17: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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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족 万引き家族 Shoplifters>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8


** 이 글은 더불어숲 회원 심은희씨가 쓴 글입니다.

세세한 영화내용이 서술되지는 않습니다만,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께는 스포일러가 될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수 있습니다.

영화 보실 분들은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마음으로 이어진, 보통이 아닌,


고레에다의 이번 영화는 잔잔하고 감동적인 가족 영화가 아닙니다. 단순히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인물의 대사와 행동에 담긴 인물간의 관계와 각각의 사연들, 그리고 그들의 침묵과 행간에 고인 감정과 판단과 의도를 읽어내야만 하는, 고도의 인간사회학적 과제라 하겠습니다. '어느 가족'을 복기復棋하면서 감독이 일부러 보여주지 않은 나머지 이야기들의 퍼즐을 맞추려는 노력이야말로, 제대로 된 공부, 혹은 인문학적 성찰을 실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가족'은, 도덕과 윤리의 간극, 인간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신뢰, 가족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제도권 사회의 모순을 직면하게 해주니 말입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매우 영리한 전술을 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전적인 '리얼리티' 수법입니다. 이 영화는 시간순으로 흘러갑니다. 단 한 번도 과거 장면을 플래시백하지 않습니다. 과거를 보여주면 가족 구성원의 면면을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데도, 그저 강물이 흘러가듯 앞으로만 나아갑니다. 바로 그들에게 이해받을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첫 번째 리얼리티입니다. 타자를 그저 타자로 보여줍니다. 그들의 집은 고층집 가운데 자리한, 개발 안 된 단층집입니다. 법적으로 독거노인 한 분이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다섯 식구에 새로 들어온 여자 아이까지 총 여섯 명이 복작이며 살고 있습니다. 사회 제도는 허술하고, 그러한 허술함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는 그들을 알아채지 못하고, 알아챈다 해도 격리시키면 그만입니다. 그들은 이해를 받지 못합니다. 그런 그들을, 관객이 찬찬히 이해하고 동정하도록, 과거를 친절하고 세세하게 보여준다면 그런 형편없는 허구도 없을 겁니다. 우리가 그들의 사연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싶다면, 무작정 보여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스스로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영화를 한두 번 더 보든가, 영화 상영 시간, 몇 배의 시간을 들여 반추하고 곱씹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화를 봤을 뿐 이해하지는 못한 겁니다. 이 영화는 정확히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없이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편법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의 도덕관념은 매우 희박해 보입니다. 양심도 수치도 없는 철면피처럼 보입니다. 그들에게 이해와 변명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사회 제도는 그들을 배제하거나 선별해낼 뿐 아량을 베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돕고 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이 영화 속에서 대답을 해 보겠습니다. 불우하고 상처받고 위험한 그들을 돕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입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두 번째 리얼리티입니다. 오사무는 버려진 쇼타를 데려와서 함께 삽니다. 그는 쇼타에게 아버지이고 싶습니다. 무식한 전과자로 도둑질과 막노동으로 살아가지만, 아이들에게 도둑질을 전수해주며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하고 유쾌한 아버지이고 싶습니다. 그들은 품위도 없고 위선도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를 살리고 돌보고 챙깁니다. 그들이 모여 사는 건 단지 이해관계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가 필요하다는 걸 압니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읽습니다. 오사무와 쇼타, 노부요와 유리, 하츠에와 아키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같은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사무는 쇼타에게 자신에게 필요했던 아버지를 재현합니다. 쇼타에게 자신의 본명을 주고, 쇼타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치유해갑니다. 노부요는 친부모로부터 학대받는 유리를 품습니다. 유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주면서 거짓 사랑으로부터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츠에는 전남편의 연금이나 뜯어먹는 제멋대로인 할머니 같지만, 가족 전체를 거두고 돌봅니다. 그녀는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필요한 도움을 줍니다. 그녀는 남편의 두 번째 부인의 손녀, 아키를 키웁니다. 자신이 남편의 두 번째 부인으로 인해 버림받았듯, 아키 역시 여동생으로 인해 부모에게 내팽개쳐집니다. 그녀는 무관심으로 멍든 아키에게 자꾸 여기저기가 예쁘다고 말해줍니다. 하츠에는 아키의 감정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녀를 치유하면서, 자신도 치유합니다. 만약 이 영화가 이런 가족의 내부사를 보여주는 데서 끝났더라면, 1시간 30분짜리 영화였다면, 좀더 대중적인 관객을 확보하며, 집에 가서 편하게 발 뻗고 잘 수 있는 흔하디흔한 가족 영화로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고레에다는 마지막 30분을 기가 막히게 끝맺습니다. 여기에 세 번째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그들만의 유토피아였던 가족은, 훌쩍 커버린 쇼타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영화는 마치 돌변하듯이, 오사무와 노부요를 범좌자의 자리에 앉혀 심문합니다. 그리고 아키와 쇼타와 유리도 심문합니다. 결코 고압적인 심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팩트를 가지고 낮은 목소리로 질문합니다. 방금까지 보아왔던 가족을 우리는 외부자의 시점에서 다시 바라봅니다. 거기에는 가짜 가족의 실체가 새롭게 재구성됩니다. 아이와 놀아주던 오사무도, 유리를 안아주던 노부요도 아이에게 도둑질을 가르치고, 아이를 멋대로 유괴하고, 사체를 유기한 사람일 뿐입니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아무 대답을 못합니다. "아이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나요?" "왜 아이를 자신의 본명으로 부른 거죠?" "아이들이 당신을 뭐라고 부르던가요? 엄마? 어머니?" 노부요는 마치 울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눈물을 훔칠 뿐입니다.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팩트뿐입니다. 진심을 표현할 언어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진실은 어쩌면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금기어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표현되지 못한 진실과 변명할 수 없는 사실 사이에서, 노부요처럼 답답한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고레에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후일담으로 우리를 또 한 번 놀래킵니다. 그들이 바로 이 파국을 통해서 한층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전과자인 오사무 대신 5년형을 사는 노부요는 쇼타를 불러 친부모를 찾을 수 있는 방도를 알려줍니다. 노부요와 오사무는 쇼타의 부모가 되기에 역부족임을 깨닫고 스스로 부모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쇼타 역시 그 마음을 너무 잘 압니다. 오사무는 자신을 버리려 했냐는 쇼타의 질문에 아무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쇼타는 그제서야 마음속으로 오사무를 '아빠'라고 부릅니다. 가족의 진정한 해체는 자발적인 윤리, 내적 성장에 따른 것입니다. 친가족에게로 돌아간 아키와 유리도 성장합니다. 유리는 더이상 부모의 폭력에 순순히 응하지 않습니다. 더욱 단단해진 유리는, 창 너머를 바라봅니다. 아키는, 심문 과정에서 하츠에의 선심이 돈 때문인지 의심하지만 폐허가 된 할머니 집으로 돌아옵니다. 힘차게 문을 열어제치는 아키에게서, 할머니 집에 또 하나의 가족이 만들어질지 모른다는 희망을 느낍니다. 언젠가 그들이 다시 모여 살지도 모르지요. 고레에다는 '희망은 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영화 내내 고레에다는 질문하고 있습니다. 낳았다고 다 가족도 아니고, 키운다고 다 가족도 아닙니다. 영화 중반에 아키가 오사무에게 질문합니다. "당신들은 무엇으로 연결됐나요? 보통은 돈이던데." 이에 오사무가 대답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어. 우리는 보통이 아니거든." 보통이 아니라는 말은 중의적입니다. 사회 중심부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우리는 사회의 강요된 준거틀을 거부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보통 이하든, 보통 이상이든, 모두가 돈, 돈, 돈 하는 보통에 환장한 사회에서 고레에다는 보통이 아닌 공동체의 가능성을 조심스레 두드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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